코레일에 다니는 손위 형님이 있습니다. 지난 설날 처가에 가니 형님이 제 직급을 물어봅니다. 아마 제 나이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을 겁니다. 40대 중반이면 일반회사에선 과장 달고도 남을 나이인데 진급했다 그런 소리가 없으니 궁금했나 봅니다.

 

그냥 사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엔 몇 급이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형님이 원하는 답을 시원하게 해드렸습니다. 과장 직급은 꿈도 못꾸고 있고 나와 비슷하게 입사한 사람들도 50세 전에 승진할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이 말에 형님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부산지하철 근속승진제 아니었어? 아유 그런 걸 안하고 뭐해. 우리도 인사적체 심해서 근속승진제 없으며 승진 꿈도 못꿔. 나이 오십 넘어서도 말단 직급에 있으면 그게 얼마나 비참해. 직원들 사기문제도 있지." 형님의 목소리에 뿌듯함이 느껴졌습니다.

 

형님은 근속승진제를 얘기하면서 '노조가 잘했어' 하는 말을 여러번 했습니다. 형님은 사실 노조에 우호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사무직에서 20년 넘게 근무했기 때문에 노조와 충돌도 많았습니다. 집안 모임에서 그 얘길 털어놓으면서 '노조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며 제게 하소연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형님이 노조가 잘했다고 자랑하는 건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몇 달 전인가 둘째 아이가 저를 처다보며 엄마에게 귓속말을 하길래 뭐냐고 물어보니 '아니예요' 하며 내뺀 적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다시 물었는데 아이가 아빠가 회사에서 과장이냐고 묻더라는 겁니다. 아직 과장 못 달은 선배들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이 말은 제게 상처라고 할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이 속을 슬쩍 긁은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5년 뒤에도 제가 이런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일년에 두세번씩 인사철이 돌아오는데 그때마다 승진할 때 되지 않았냐는 식으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전 "별로 신경 안 써요? 라고 답하곤 하는데 이 말은 솔직히 말하면 반만 사실입니다. 승진에 애를 태우며 살고 싶진 않은 게 제 바램입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지만 그런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여러명입니다. 그렇게 쌓이면 그런 질문을 매번 태연하게 넘기기가 참 쉽지않아집니다. 걔 중엔 걱정해준다고 하는 얘긴데 그게 오히려 얄밉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주변에서 놔두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게 인사입니다.

 

저와 같은 나이인 타 부서 동기 한명은 인사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탁자를 주먹으로 치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안그래도 승진이 늦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보다 나이로 보나 기수로 보나 차이가 좀 나는 후배가 먼저 진급하자 치욕감을 느낀 것입니다. 이 친구는 취중에 간부에게 '선배도 내한테 기대하지 말라'며 엄포를 넣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회사의 승진 소요기간 자료를 보면 참 암울합니다. 신입사원이 과장 직급인 4급이 될 때까지 평균 승진 소요기간은 23년 6월입니다. 요즘 신입사원들 나이가 대략 30을 넘습니다. 30살에 들어왔다 치면 54세 쯤에 과장이 되는 겁니다(운전직급의 경우엔 57세). 예전엔 30대 중반 과장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나이면 50대 과장과 40대 선배들 밑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막내를 벗어나기도 어렵습니다.

 

승진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지만 이 승진제도라는 게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조직에서 좋은 평점은 대개 기수나 연장자 순으로 줍니다. 만약 운좋게 자신이 속한 조직에 같은 급수의 사람 중 나이나 기수가 높으면 좋은 평점을 받아 의외의 승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진급이라는 경쟁이 회사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54세 과장을 두고 벌이는 게 과연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과장은 간부급도 아니고 사원과 간부의 중간인 중간층입니다. 퇴사를 5년 조금 넘게 남긴 직원에게 중간 간부로서 열심히 역량을 발휘하라는 게 적절한 것일까요? 그 걸 위해 열심히 일해서 과장 되라면 이게 말일까요 똥일까요?

 

인사적체가 심화된 상황에서 50대 과장은 경쟁이 아닙니다. 잘 하면 소수 40대 중 후반에 과장을 달고 대개는 50대 중 후반에 과장을 달거나 아예 사원으로 퇴사할 수 있습니다. 일부 소수 40대 중후반 과장 탄생을 위해서 나머지 대다수가 경쟁의 희생자가 된다는 게 참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어떤 조직이든 그렇지만 특히 인사적체가 심화된 조직에선 경쟁보다 내적 결속력이 더 필요합니다. 일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자리를 경쟁시키면 경쟁의 효용보다 경쟁의 비용이 더 많이 듭니다. 내적 결속력으로 다진 내부규율이 제한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도한 경쟁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내부의 비판과 지적에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하는 게 승진을 위해 일부 간부들에게 줄을 대거나 충성경쟁하는 것보다 회사에 더 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내부규율이 설러면 승진 같은 내부 경쟁으로 조직을 자주 흔들어선 안되는 것이고요.

 

회사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50대 중반에 과장을 달게 되어있습니다. 이 나이에 과장은 경쟁이 아니라 그 동안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 직원에 대한 예우 수준입니다. 회사를 위해 20년 이상 일한 사람에게 그 정도 직함은 주는 게 맞습니다. 그걸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경쟁시켜 주겠다는 것은 잔인한 짓입니다.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서 품위있게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건 노조와 협상할 내용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조직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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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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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준아빠 2012.07.03 0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과장함 달아보자...
    동창회가서 진급얘기 나오면 부끄러워서 못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