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하철노동조합 간부들이 5.18민주화운동 영창·법정 체험행사와 5.18묘역 참배를 다녀왔습니다. 5월 16일 오전 10시에 출발한 간부들은 광주에서 체험과 참배를 마치고 오후 11시 부산에 돌아왔습니다.   

 

 

 

 

체험 행사가 열린 5.18 자유공원은 원래 군인들의 교육과 훈련을 하던 상무대였습니다. 수많은 민간인을 수용하여 고문과 구타를 일삼은 곳은 상무대가 아닌 군 영창이었습니다. 영창부지가 이후 도시계획으로 도로에 편입되면서 영창부지에서 150미터 떨어진 상무대를 민중항쟁의 역사를 보존하게 된 것입니다.  

 

 

 

 

간부들의 체험은 오리걸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창에 끌려온 민간인들은 일단 두들겨 맞고 조사과정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오늘 체험행사를 진행하시는 분들은 모두 이 영창에 끌려와 곤욕을 치렀던 분들입니다.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고문에 대해 설명해주신 분도 실제로 고문 때문에 손톱이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영창은 한 소대에 150명이 수용되었습니다. 이날 체험에 참여한 간부들은 100여명으로도 영창은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50명이 더 수용된 것입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몽둥이가 날아들고 독거실에 가뒀다고 합니다. 이 좁은 독거실에는 20명을 넣었는데 여긴 앉을 수도 없어 서서 잤다고 합니다.

 

 

 

 

이곳 법정은 5.18민주화운동 당사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1980년 8월에 만들어졌습니다. 61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과 무기, 20년 이하 형량 등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1983년 12월 24일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재판이 터무니 없다는 걸 군사독재정권조차 인정한 것입니다.

 

 

 

 

재판장에서 광주시민들은 애국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용감한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재판장과 그 악랄했던 헌병들도 그때는 제지를 안했다고 합니다.

 

 

 

 

체험이 끝난 후 간부들은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습니다.

 

 

 

 

 

 

 

5.18 묘비가 일반 묘지와 차이나는 점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고인의 부모와 자식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돌아가신 날짜가 대부분 5월 20일 전후라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모두 어느날 갑자기 한꺼번에 돌아가셨다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를 밴채 머리에 총을 맞은 새댁.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다 새로 산 운동화가 벗겨졌고 그걸 주으러가다 총에 맞은 초등 1학년 학생. 너무 어리고 너무 가난해 사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우연히 날아온 총탄에 맞은 게 아니라고 합니다. 대부분 조준사격이었다고 합니다.

 

 

 

 

봉분이 없는 묘는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분들입니다.

 

 

 

 

 

 

 

두부처럼 잘려나간 젖가슴은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한 군인이 젊은 여성의 가슴에 대검을 찌르고 그걸 돌려 빼내면서 젊은 여성의 가슴이 두부처럼 풀어졌던 것입니다. 

 

 

 

 

광주는 아직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안내한 5.18단체 회원은 묘지를 소개하면서 때때로 목이 메여 잠시 가다듬다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권력은 그 아픔을 치유하기는 커녕 더 후벼파고 있습니다. 가슴을 찌른 군인이야 명령을 받고 분별력 없이 했다지만 지금 권력에 앉아 있는 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요? 그들은 지금도 광주를 진압하기를 꿈꾸는 걸까요?

 

 

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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