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이 일어일문이었던 까닭에 어학연수라는 핑계로 방학 때마다 일본은 자주 들락거렸지만 세월이 흘러도 동남아를 벗어나질 못했다. 발을 넓혀 본데야 겨우 중국이 다였다. 그런 나에게 호주란, 여행이란 걸 생각할 때마다 막연히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그냥 한번 가보고 싶은 미지의 세계 같은 곳이었다. 




사실, 호주에 대한 갈망(渴望)에 비해 그다지 흥미도 아는 것도 없었다. 패밀리 레스토랑 ‘아웃백(Out Back)’ 덕분에 그 곳 분위기에는 이미 친숙해져 있었지만, ‘아웃백’의 의미를 알고부터는 왠지 꺼림직한 기분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웃백’이란 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호주의 세계로, 사전적 의미로는 ‘갈 가치가 없는 곳’ 즉, 사막 한 가운데를 뜻한다. 거기다 워킹(Walking)이나 우푸(Wwoof)를 다녀온 이들에게 전해들은 그곳은, 하루 종일 소똥을 치우거나 닭털을 뽑는 곳일 뿐이었다. 거미와 뱀이 득실대고 옆집에 가려면 1km정도는 차를 타고 달려야한다는...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 아등바등 애쓰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호주에 대해 어렴풋한 몽상가적인 동경(憧憬)을 가슴에 품었던 것 같다. 


오른쪽에서 시계 순서대로. 1 생츄리코브 마을공원. 2 브리즈번의 코닥비치. 3 두번째는 단돈 16달러에 구입한 해산물. 4 마지막은 직선길이 43km의 서퍼스 파라다이스비치.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가볼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설득 반 강요 반으로 떠난 호주의 첫 관광지는 브리즈번의 코닥비치였다. 누드비치는 아니지만 다들 벗고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기대를 걸며 해변에 들어서니, 여인 한명이 엎드려 홀딱 벗고 계신다. 남편을 찍는 척하며 렌즈를 향해보지만 카메라 속 누드미녀는 실제 거리보다 멀어 잘 보이지가 않는다. 

대충 몇 장 찍은 후 골드코스트의 승마장으로 향했다. 말이 이렇게 큰 동물이었나? 호주 말은 원래 더 큰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등에 타고 산책하는 게 전부지만 기분은 한없이 좋기만 하다. 일행 모두 유치한 포즈로 사진 찍으며 행복해한다. 그런가? 이렇게 일상과는 사뭇 다른 시간이 여행이라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다음 목적지인 백만장자의 마을을 향해 이동차에 올랐다. 

‘이거는 영국 왕실의 누구 집, 저거는 헐리우드 영화배우 누구 집’하며 설명에 열심인 가이드의 뒤를 따라 생츄리코브 마을 공원에 도착했다. 뿌리가 가지에서 땅으로 파고 들어가며 자란다는 신기하게 생긴 형상의 나무들은 남자의 성기를 닮아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한다. 가이드의 설명이 없었으면 좋았을걸.왠지 만져 보기가 조금 그렇다. 벤치에 앉으니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렇게 가까이 바다가 있는데도 짠 냄새가 나지 않는 걸 신기해하고 있으니, 호주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바다 속의 수많은 산호가 부서져 모래사장을 만들어 바다냄새가 없고 자동차가 달려도 바퀴가 빠지지 않으며, 해일이 밀려와도 주위의 섬 근처에서 다 부서지는 것은 물론 지진도 없다한다. 축복받은 땅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땅덩어리가 너무 커서인지 관광지마다 이동시간이 길어 몹시 허기지다. 저녁만찬에 대한 왠지 모를 기대로 가슴이 쿵쾅거린다.(먹을 때만 심장이 반응하는 듯하다)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이 나오는 데로 입에 넣기에 정신이 없다가 호주산 맥주까지 한잔 들이켜 주고 나서야 뇌를 움직여줄 여유가 생겼다. 생각해보니 별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즐길 만큼 음식에 익숙하다. 특별한 음식이 없다기보다는 모든 음식이 이미 한국의 보편적인 맛과 비슷하다. 실컷 배를 채워주고 나니 좀 허무하다. 뭘 기대했던 걸까? 중국의 원숭이 뇌요리 같은 경악을 금치 못할 재료까진 아니더라도 캥거루 간이나 코알라 발바닥요리 정도는 기대했던 듯하다. 호주의 음식을 평가하자면 한마디로 심심하다.(지극히 필자 혼자만의 생각이다) 

빡빡한 일정을 끝내고 호텔에 들어서니 바닷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방이다. 비교하기 싫지만 끝도 없이 이어 달리는 해변이 해운대를 연상시킨다. 해운대가 곡선의 미(美)를 가지고 있다면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는 일직선으로 43km나 뻗은 직선의 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가 아닌 산호로 만들어진 새하얀 모래사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며 망각(忘却)일 것이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호텔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호텔 투숙객은 수영장이 무료라는 가이드의 귀띔을 잊지 않은 것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이용해보는 호텔 야외 수영장이기에 왠지 더 고급스러워 보이고 물도 깨끗해 보인다. 스파까지 착실하게 이용해 주고 얼른 조식을 마친 후 관광버스에 올랐다. 하루 만에 이웃이 된 듯 한 일행들에게 웃음으로 인사하며 보트를 타러 요트 계류장으로 향했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이랑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물속에서 까만 점들이 와글와글 움직인다. 들여다보니 다름 아닌 도미다. 호주는 낚시 가능한 물고기의 크기가 30cm이상으로 엄격하게 정하고 있어 선착장에도 생선이 많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지만 그래도 놀랍다. 그런 법이 있다고 잘 지키는 호주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국이라면 요트타고 나가서 몰래 다 잡아먹지 않을까? 호주인은 전복을 먹지 않기 때문에 전에는 조개가 바닷가에 깔려있을 정도였지만, 한국인의 이민이 많아진 이후 거의 소멸되어 이젠 법으로 금지된 상태란 설명도 가이드가 덧붙여 준다. 역시 대단한 한국인이란 생각과 동시에 전복 하나에까지 보호법을 만드는 호주인들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른쪽에서 시계 순서대로. 1 블루마운틴의 케이블카. 2 드림월드 입구. 3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브리즈번의 비만새. 4 더들리페이지 언덕에서 바라본 시내전경.


그런 법을 가진 국가에 알맞게 호주의 관광은 역사나 건축양식이 아닌 자연관광이 대부분 그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되는 관광지인 블루마운틴 국립공원은 정상은 평평하면서도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유칼립투스라는 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이 공기 중에 떠 있을 때 햇빛이 통과하면 파란색으로 비치기에 블루마운틴(Blue Mountains)이라 명해졌단다. 전설을 가진 세자매봉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본다이 비치에 도착하니 역시나 갈매기도 경계심이 전혀 없는듯하다. 

여기 와서 느낀 건 동물들이 참 버릇이 없다(?)는 것이다. 관광지이기에 동물이 사람을 친숙하게 느끼는 부분도 있겠지만 관광지를 옮길 때마다 신선한 느낌이 든다. 드림월드 야생동물원에서 캥거루와 악수할 때의 감촉과 코알라가 내 품으로 파고들 때의 느낌이란 참으로 묘하다. 조금 닭살스럽지만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릴 적부터 이런 느낌을 가슴에 가지고 성장하는 호주 아이들은 복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책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슴이 가르쳐 주는 또 하나의 그 무엇이다.

여행에 푹 빠져 있다 지내다보니 벌써 4일이 훌쩍 지나버렸다. 더들리페이지 언덕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니 저 멀리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릿지가 보인다. 빌라봉과 오아키 크리크 농장에 들러 구렁이 뱀도 목에 둘러보고 전통 양털 깎기 공연을 구경했다. 밤엔 현지인이 많이 가는 하드락 카페에 들러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행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슬픔이 밀려온다. 리무진을 타고 야경 구경도 하고 유람선에 탑승해 고기 썰며 저녁식사도 하고 카지노에서 게임도 하다 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마지막 날, 영화 빠삐용의 촬영장소인 갭팍 절벽에 들렀다가 드디어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감격할 준비를 하며 관광버스에서 내렸는데 의외로 호주의 상징인 오페라하우스엔 별 감흥이 들지 않는다. 건축양식이 특이하고 아름다운 건 알겠는데 머리로만 이해할 뿐 가슴으로는 느껴지지를 않는다. 호주가 가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먼저 보아서일까? 중간 버팀목 없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다리라는 하버브릿지도 나에겐 그저 철근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일 뿐이다. 사진을 몇 장 찍기는 했지만 키 큰 야자수 밑 나무 그늘에 마음이 더 이끌린다. 잔디밭 위에 앉아 눈을 감아본다. 누가 호주를 ‘아웃백’이라 부를까? 많은 사람들이 호주로 이민을 준비하는 이유가 이 나무그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애써 이 맑은 하늘과 깨끗한 바다를 부정하려 해봐도, 모국을 떠나 백인들 사이에서 차별 받으며 사는 게 뭐가 좋겠느냐고 흠을 잡으려 해봐도, 부모와 친구들을 버리고 외롭지 않겠느냐고 비난하려 해봐도 역시 역부족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귓가에 스치는 바람이, 발목에 닿는 파도가 내 자신을 속일 수 없게 만든다. 굳이 고착화된 고급 수식어로 바꾸지 않더라도 가슴이 먼저 느끼는 그 곳, 자연이 살아있는 곳 호주이다.


왼쪽 위가 갭팍 절벽. 영화 ‘빠삐용’의 촬영장소



* 이 글은 부산지하철노동조합 김헌석 조합원의 동반자께서 보내주셨습니다.         
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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