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또 하나의 약속이 흥행하지 못한다면 가장 안타까운 건 영화의 바탕이 된 실화 속 사람들이나 10억 조금 넘는 돈으로 재능기부 해가면서 이 영화를 만든 스텝들이 아니라 영화 자체의 작품성일 것이다. 독립영화 수준의 제작비와 그렇기 때문에 집중해서 만들 수 없는 환경 등이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제한하게 하는데 의외로 영화는 관객들에게 탄탄한 재미와 작품성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약속'은  '변호인'과 많이 비교된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거슬리는 주제를 담고 있어 두 영화가 제작과 상영에 어려운 점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럴 거다. 작품성에선 또 하나의 약속이 변호인보다 완성도가 좀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 평가는 변호인보다 낫다는 거다. 영화 초반부에 윤미가 죽어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했는데 이야기는 변호인보다 더 매끄러웠고 신파적 요소도 덜 했다.

 

기억에 남는 은유성 짙은 명대사들도 많았다. 동물이었던 멍게가 한 곳에 정착하면서 뇌가 없어진다는 대사는 변호인의 바위는 죽었지만 계란은 살아있다는 대사를 기억나게 했고 인터넷으로 산재를 조사하다 그만하라는 아빠의 말에 "아빠는 아는 게 뭐야?"라는 윤미의 말은 짧고 단순한 일상어였지만 영화 전체를 휘어잡았다.

  

 

 

 

일반적인 평가에서 변호인이 더 점수를 받는 것은 임팩트 때문인 것 같다. 변호인에선 송강호가 연기를 점점 끓어올려 폭발시키지만 또 하나의 약속에선 그런 임팩트가 실린 장면이 없다. 변호인은 배우들의 연기를 클로즈업해서 몰입시키지만 또 하나의 약속은 카메라가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빗겨나 있다. 그래서 배우보다 카메라가 더 많이 느껴지는 영화다. 그런데 이건 영화의 실패가 아니라 영화의 소재에서 비롯된 차이이고 감독의 의도인 것 같다.

 

변호인은 30년 전 현대사와 실존인물을 다룬 영화이고 또 하나의 약속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변호인은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인물과 사건이 있다. 변호인은 이미 알고 있는 사건과 인물에서 깊이를 구축하는 게 관건이었다. 반면 또 하나의 약속은 잘 모르는 스토리와 전혀 알려지지 않는 등장인물로 감정이입을 너무 하게 되면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다. 박철민이 송강호처럼 분노하고 내 딸 살려내라고 소리치면 관객은 민망하게 된다. 또 하나의 약속은 우선 스토리와 캐릭터부터 구축해야 했다. 여기서 관객이 느끼는 깊이의 차이가 온 것 같다.

  

변호인은 송강호 덕분에 천만관객을 부를 수 있었던 영화다. 송강호의 연기가 영화에 임팩트를 넣었다. 그러나 변호인은 송강호로 인한 문제점도 가진 영화다. 송강호의 공간이 너무 넓었다. 송강호가 등장하면 다른 배우들은 얼음이 되었다. 심지어 감독까지 보이지 않았다. 송강호의 연기가 관객을 휘어잡았지만 영화의 연결은 어색해졌고 송강호가 열폭할 수록 조연들은 존재감을 잃어갔다. 송강호의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는 있었지만 송강호의 너무나 큰 존재감은 영화라는 한편의 종합예술의 재미는 반감시켰다.

 

윤미가 죽었을 때 장면에서 만약 박철민이 아니라 송강호였다면 카메라는 죽어가는 윤미가 아니라 송강호의 절규하는 모습을 찍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객의 감정의 동선은 이미 송강호에 포획되어 있는 상태니까. 또 하나의 약속은 아빠의 택시 뒷좌석에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윤미의 모습을 찍었다. 그래서 윤미를 연기한 박희정의 연기는 빛을 발했다.

 

또 하나의 약속의 조연들은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강한 인상의 연기를 남긴다. "내 남편도 거기서 일하다가 32살에 죽었어요. 씹새끼들, 창자를 갈아먹어도 시원찮아요... 저는 어린이집에서 일해요"라는 말로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일으킨 유례없는 대사를 친 배우 장소연은 영화 등장할 때마다 맛을 냈고 아주 짧게 짧게 등장하는 '됐고' 기자가 영화 마지막 "됐고"라는 말로 삼성 측 변론자를 힐난하는 장면은 절묘했다.

 

또 하나의 약속 관람을 권유하면서 "우리가 꼭 봐줘야할 영화"라면서 의무감을 자극하는 멘트들을 볼 수 있다. 이런 홍보 멘트는 썩 와닿지 않는다. 의무감으로 영화를 볼 사람이 얼마나 될까?  10만? 이 영화는 의무감에 기대 관람을 구걸할 그런 수준 낮은 영화가 아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7번방의 선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게 될 것이고 왠만한 천만 영화 능가하는 작품성도 있다. 만약 내 말이 사실이 아니면 영화비 9천원 돌려드린다. 이 정도로 자신있게 권할 정도의 영화라는 말이다.

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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